※ 아포칼립스 세계관이지만, 특정 아포칼립스는 아닙니다. ※
※ CP, NCP 어느 하나를 상정하지 않은 글입니다. 좋아하시는 쪽으로 봐주세요. ※
※ 죽음, 자살 등의 요소가 있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주임님.”
김솔음은 드디어 제가 미쳐버린 것인지 의심이 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백사헌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난날의 호칭을 입에 담을 리가 없었다.
“언제적 호칭이야.”
백사헌은 말없이 건물 사이 하늘을 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김솔음 또한 백사헌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하얀 먼지가 날려오기 시작했다. 김솔음은 손을 들었다. 손바닥에 내려앉는 차가운 감촉.
첫눈,
두 사람이 전부가 된 세계에서 4번째 겨울,
“넌 싸이코패스 새끼였어.”
김솔음은 혼자가 됐다.
*
백사헌이 처음 인지한 것은 커다란 공허였다.
눈을 뜨자 보이는, 말 그대로의 공허. 하늘을 찌르듯 높았던 고층 빌딩들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런, X발···!”
절로 욕이 나왔으나 괴담을 숱하게 겪은 경험 덕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백사헌이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은 시원하게 뚫려 잘 보이는 밖과 자신의 발 바로 앞에 생긴 낭떠러지였다. 사내 연락망을 통해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 깔끔하게 절단된 듯 구의 형태로 잘려나간 건물, 다급하게 들어오는 상사. 백사헌은 현 상황을 하나의 괴담 현상이라 생각했다.
그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회사는 이 현상을 괴담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현장탐사팀은 생존 인원 전원 조를 재편성하여 탐사를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백사헌은 회사의 판단에 동의하면서도 비웃었다. 처음 인지하고 본 것은 제 코앞만이 아니었다. 근처부터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모든 것들에 크고 작은 공허들이 생겨있었다. 모두가 괴담에 빠졌거나,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현실과 똑같은 괴담이거나. 이 넓은 공간을 탐사하는 것도 헛수고라고, 백사헌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흘러갈수록 괴현상은 진행되었다. 건물은 더 이상 변하지 않았으나 인간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어졌다. 처음에는 같은 조였던 사람이. 다음은 제법 익숙한 얼굴이. 다음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이. 때로는 한 명, 때로는 백 명. 규칙성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백사헌은 생각했다.
아, 나는 살아서 다행이다.
계절이 지났다. 여전히 탐사에는 진척이 없고, 회사 사람들도 거의 사라졌다. 회사에서 만든 소원권이나 다른 약들도 효능을 잃었다. 전용 장비들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는 ‘괴담’ 또한 사라진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여전히 식물들은 자라났으며, 마트같은 곳에는 먹을 것이 계속 남아있었다. 전자기기는 사용이 불가했지만, 물과 음식이 있다는 점은 안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조금씩 줄어갔기에 음식을 두고 싸울 일도 없었다.
백사헌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편의점에서 육포를 꺼내 뜯으며 방금의 상황을 떠올렸다. 잠깐 뒤를 돌아본 사이 사라진 조원 셋. 모두 동시에 사라졌다. 도대체 탈출 방법은 언제 나타나는지. 가느다란 신경 줄을 갉아 먹듯 거슬리는 기분. 초조함. 애써 외면하고 있었으나 백사헌은 여지껏 직감하고 있었다. ‘괴담’이 괴담답지 못하다는 것을. 질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백사헌은 텅 빈 거리를 걸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몇 생각들이 떠올랐으나 탈출이 불가한 시점에서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백사헌”
괴담 발생 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용케도 그 적은 사람들 중에서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어느새 앞에 서있었다.
“김솔음?”
“반말?”
“···주임님.”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놈은 희미하게 웃었다. 초겨울의 산뜻한 냄새 때문인지 놈은 평소보다 유약해 보였다.
아니, 유약하다니. 김솔음. 저놈은 싸이코패스잖아.
마음을 다잡은 백사헌은 경계 태세로 김솔음을 바라보았다. 김솔음은 그 모습에 가볍게 웃었다. 여전하네. 김솔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는 브라운을 내려다보았다.
“브라운한테는 인사 안 해?”
“······. 오랜만이다.”
김솔음은 쓰게 웃었다.
“브라운도 분명 흥미롭게 볼 텐데.”
백사헌은 벌써 질린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으며 회사로 향했다. 간간이 김솔음의 미친 소리를 받으면서 백사헌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미치도록 반복되는 한 달. 긴 시간이 흐르고 나니 회사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괴현상에 사라지는 사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남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 등. 각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이 사라졌다. 백사헌은 회사 건물에서 허공을 내려다보는 김솔음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자신 앞에서 ‘브라운’에게 말을 거는 일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김솔음’이 김솔음 같지 않았다.
“주임님”
“왜”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에 백사헌은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김솔음은 역시 싸이코패스였다. 허공을 내려다보던 김솔음은 시선을 올렸다. 백사헌도 그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첫눈. 두 사람이 맞이한 첫눈이 내렸다.
“가자.”
김솔음은 한참이나 눈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뒤에서 죽일 생각하지도 말고. 다 안다.”
“아니, 제가 무슨 싸이코패스인줄 아세요?”
꼭 한 마디를 하게 만든다니까.
백사헌은 오랜만에 차오르는 혈압에 당분간 춥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 근데 어디를요.”
뒤늦은 질문에 김솔음은 백사헌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은 건 자기면서! 백사헌은 억울함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김솔음의 시선을 느끼고 금방 제 표정을 되찾았다.
“회사 밖에도 사람 있는지 봐야지.”
아, 네.
백사헌의 짧은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은 회사 밖으로 나섰다.
*
김솔음과 백사헌은 연료가 남은 차를 찾아 도시를 탐사했다. 그러면서도 서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따금 말을 걸기도 했다.
어둠탐사기록에서도 이런 괴담이 있다는 소리는 보지 못했는데. 소원권의 효력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 빼돌릴 걸 그랬나? ······. 위험한 생각이다. 현재에 집중하자.
김솔음은 이따금 드는 후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보조석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백사헌을 보았다. 이 상황에서 잠이라니. 독사다웠다.
“백사헌”
“······”
설마 진짜로 자나?
“대답”
“······아, 왜! 요.”
안 자는군. 그럼 그렇지.
백사헌은 피곤한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김솔음은 그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 싸이코패스랑 함께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니. 김솔음은 떨리는 손에 운전대를 꽉 잡았다. 그 모습이 백사헌의 눈에는 화가 난 싸이코패스라는 걸 모른 채, 김솔음은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침묵은 차 안에 자리했고, 빠르게 운전하던 김솔음은 도시 외곽 주유소에서 멈추었다. 김솔음은 차에서 내려 주유소 내부를 확인했다. 사람이 있을 거란 희망은 아니었다. 음식이 있는지, 연료와 전기가 남아있는지. 김솔음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충분한 자원이 있다는 걸 확인한 김솔음은 주유소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뜻밖이었다. 처음 회사를 나섰던 한 달간은 사람의 흔적이 발견되는 일이 많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아예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방에서는 방금까지 누군가 있던 듯한 생활감이 느껴졌다. 생활감은 뒷문으로 이어져 도로를 향해있었다.
사람이 있었다.
“백사헌”
“뭐 찾았어요?”
김솔음은 백사헌을 불렀다. 순순히 따라온 백사헌은 방 안의 온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쫓아갈 거예요?”
당연하지.
김솔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이서 있는 건 더 사양이었다. 백사헌은 김솔음은 잠시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말했나. 김솔음은 백사헌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걱정하며 마주 바라보았다. 여기서 먼저 기선제압을 해야 했다. 김솔음의 걱정과는 달리 백사헌은 금방 시선을 돌렸다. 안도한 김솔음은 이겼다고 생각하곤 물과 음식을 챙겼다.
“연료 넣어라”
“······네.”
백사헌은 대답하고 부족한 연료를 채웠다. 그리고 여분의 연료를 더 챙겼다. 착실하게 제 할 일을 끝낸 두 사람은 쉴 틈도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흔적이 이어졌던 도로를 따라 달리면 이따금 건물이 나타났다. 김솔음과 백사헌은 그때마다 정차해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몇 번을 따라 왔을까. 어느 작은 마을로 들어간 두 사람은 희미한 흔적을 따라 한 집에 도착했다.
“계십니까.”
김솔음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기다려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문을 여니 바닥에는 종이와 연필이 있었다. 김솔음은 직감했다. 간발의 차로 늦었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이었음을.
“주임님”
백사헌이 불렀다. 김솔음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정말로 저 녀석과 단 둘뿐이다. 김솔음은 고개를 숙였다. 노란 장판 위 흰 종이에는 휘갈긴 글이 있었다.
내가 마지막 남은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직감적으로 나는 곧 죽을 것 같다.
인간의 본능이다.
혹여 누군가 이 편지를 발견하거든 희망을 놓지 말아라.
희망만이 네가 살 길을 비춰줄 것이다.
희망은 흔들리지 않는 횃불이 될 것이다.
나 외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한다.
김솔음은 편지를 주웠다. 고이 접은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짧게 고개를 숙여 앞선 희망에 묵념했다. 김솔음은 방 밖으로 나와 숨을 들이켰다. 맑은 찬 공기가 들어왔다. 비록 김솔음의 희망은 진작에 꺼진 지 오래였으나, 누군가가 보여준 희망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마음속으로 짧은 감사를 전한 김솔음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이제 정말로 두 사람뿐이겠지만, 김솔음은 누군가가 남긴 흔적들을 살펴볼 것이다. ······인간의 본능이다.
“···사라진 거죠?”
“보면 몰라?”
“아니, 알아! 요!”
······. 이놈도 변함이 없네.
고개를 좌우로 흔든 김솔음은 이 집의 온기가 오랫동안 남아있길 바라며 문을 꼭 닫았다. 추운 겨울에 오랫동안 희망이 남아있길 바랐다.
“아, 눈이다.”
백사헌의 말에 김솔음은 하늘을 보았다. 하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벌써 두 번째 겨울인가.
- 맞습니다, 친구! 겨울의 눈은 보기에는 무척 아름답지요!
만약, 브라운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말했을 듯했다. ······조금 다른가?
김솔음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착한 친구’를 바라보았다. 1년 전, 괴담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무리 불러봐도 브라운은 입을 열지 않았다. 김솔음은 그 당시를 생각했다. 제 생각에 그는 지금까지 브라운에게 많은 것을 기댄 모양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불어오는 찬 바람에 김솔음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과거가 된 일을 어쩌겠나. 방영되는 쇼는 이미 끝난 것을.
하얀 눈이 지난날을 덮어주듯 펑펑 내렸다.
“야”
“왜요······. 주임님.”
“······. 둘만 남았는데, 주임은 무슨.”
*
전국을 가볍게라도 살펴보기로 한 두 사람은 여전히 떠돌아다니며, 유통기한이 넉넉한 통조림 따위를 모으며, 삶을 이어갔다. 전과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람을 찾고 생존에 중점을 둔 것과는 달리 이따금 경치를 구경하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즐겨보기도 했다.
백사헌은 가끔 너무 태평한 건 아닌지 생각했다. 제 옆에서 흥얼거리는 김솔음을 볼 때마다 더욱 그랬다. 이제는 놈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는 건 아니었다.
“김솔음”
“왜”
절벽에 걸터앉아 노을진 바다를 보며 흥얼거리던 김솔음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밀치려고?”
백사헌도 이제는 화가 나지 않았다. 놈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자신을 정말로 싸이코패스라고 생각하는 듯 했기에 백사헌은 제 할 말을 했다.
“언제까지 있을 거야.”
백사헌은 어느새 돌아온 겨울에 춥다고 생각하면서 제 옷을 여몄다. 김솔음은 한참을 답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백사헌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슬슬 그만할까.”
문을 열려던 백사헌은 손을 멈췄다. 이상하게 제가 회사에서 봐왔던 모습과는 달리 힘없는 모습이었다. 모든 것에 포기한 모습. 원래의 김솔음이 희망적인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런 비관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백사헌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뭘? 당장 묻고 싶었다. 백사헌의 입술이 달싹였다.
“춥네, 가자. 남은 약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솔음은 어느새 깔끔한 차림을 유지했다. 절벽 흙바닥에 앉아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백사헌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장은 주름 하나 없어 보였으니까. 대단한 놈이었다. 아마 작년부터인가. 김솔음이 다시 정장을 차려입기 시작한 건. 드디어 미친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처음 그 이유를 물어봤을 때, 자신은 지금 외근을 나온 거라는 소리에 정말 기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친 건 분명했다. 백사헌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별다른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서로 합의를 본 것도 아닌데. 그냥 그랬다. 백사헌은 영원히 남을 듯한 찝찝한 기분에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작은 불안함을 간직한 채, 탐사는 계속 되었다. 어째서 두 사람은 사라지지 않는지, 무슨 이유로 탐사를 계속하는지. 서로 묻지 않았다. 친해지지도 오해도 풀리지 않았으나 그저 그런대로 둘의 관계는 변했다.
해가 저물고 근처 도시에 들른 두 사람은 숙박업체를 찾았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아무 집이나 쓰면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그러지 않았다. 문을 따고 들어온 호텔의 방. 그곳에서 백사헌은 오래 지난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러나 기쁘지는 않았다. 애초에 흔적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백사헌은 그 흔적을 휴지로 덮었다. 그리곤 먼지 쌓인 호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사용감이 없어 낡고 먼지가 있긴 했으나 최근 가진 잠자리 중 가장 푹신했다.
운이 좋네. 오늘은 편하게 잘려나.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감고 있자니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김솔음이겠지. 백사헌은 제 옆 방에 들어간 사람을 생각하며 그 소리를 무시했다. 느릿느릿한 말소리는 몇 번이고 이어졌다. 이번에는 도대체 어떤 짓을 하는 건지. 확인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백사헌은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그 옆을 보면, 김솔음은 ‘브라운’을 들고 말을 걸고 있었다.
웬일이지? 한동안 안 하던 행위인데.
제가 열받던 행위 중 하나를 오랜만에 하는 김솔음을 보며 백사헌은 제법 놀랐지만, 그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백사헌은 김솔음의 시선을 보았다. ‘브라운’이 아니라 저 너머를 보고 있는 시선. 아니, 딱히 무언가를 바라보지 않는 시선이다.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보자면. 그래. 김솔음은 지쳐 보였다.
백사헌은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동안 서 있었다. 김솔음은 지쳤구나. 믿기지 않는 말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언제부터? 물론, 김솔음이 지친 건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어쨌건, 타인이니까.
침대에 도로 누우려던 백사헌은 우연히 거울을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지나가며, 달빛이 밝혀주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평소보다 유약해 보이던 김솔음의 모습. 아, 그때부터인가. 백사헌은 방금까지 생각하던 질문의 답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와 같은 상태라는 걸 알았다. 백사헌은······.
생각을 멈췄다.
백사헌은 침대에 누워 밖을 응시했다. 건너편의 커다란 구멍이 난 건물들. 이젠 익숙한 경치다. 그 시야 사이로 초점을 방해하는 무언가 날렸다.
세 번째 겨울이었다.
*
김솔음은 꽤 오래 아무 말도 안 하는 백사헌을 곁눈질했다. 오랜 시간을 같이 있어 보니 제 옆의 백사헌이 어둠탐사기록에 실린 독사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특별한 모습을 보고 깨달은 건 아니었다. 묵묵히 지낸 시간이, 그렇게 느끼게 했다.
“도착했다.”
오랜만에 정장을 입은 백사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사택에서 같이 출근하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아니, 달랐겠지. 김솔음은 돌아온 회사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했다. 그들이 어째서 회사로 돌아온 것인지는 그들조차 몰랐다. 지쳐버린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도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저, ‘돌아갈까.’라는 혼잣말에 ‘그래.’라고 무미건조한 답이었을 뿐이다.
천천히 고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전처럼 공허 앞에 섰다. 여전히 황폐한 모습과 엎어져 있는 물건들은 기억과 다른 것이 없었다. 이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인가. 김솔음은 헛웃음을 흘렸다.
“주임님.”
백사헌의 목소리. 김솔음은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언제는 익숙했던 호칭이 얼마 안 들었다고 이렇게 낯설 줄이야.
“언제적 호칭이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김솔음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서 하얀 먼지가 날려오기 시작했다. 김솔음은 손을 들었다. 손바닥에 내려앉는 차가운 감촉.
첫눈,
두 사람이 전부가 된 세계에서 4번째 겨울,
무심코 제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백사헌은 생기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넌 싸이코패스 새끼였어.”
백사헌은 회사 아래 하얗게 새버린 잔디를 향해 몸을 누웠다. 김솔음은 아래를 보았다. 당당한 표정. 언젠가의 지하철에서 자신만만하게 내리던 그것과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솔음은 더 이상 백사헌에게 보여줄 무언가가 있지도 않았고, 귓가에는 웅성대는 소리 대신 바람 소리만이 들렸다.
김솔음은 혼자가 됐다.
막연히 단 둘만 남은 아포칼립스를 생각하다보니 어정쩡하고 개연성 떨어지는 세계관이 되었네요...
중간에 감정선이 이탈하는 게 보인다면 글쓰다 분노하다 글쓰다 분노한 흔적입니다. 진정하려고 얼렁뚱땅 글을 쓴거라 매끄럽지 못하네요. ㅠㅠ 분노하다 보니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아서 급하게 마무리한 것도 크고요.
딱히 세계관에 대해 정해둔 것은 없지만...그래도 저는 모두가 세계 이면에서 잘 살거라 믿고있습니다 :)